세상에서 가장 큰 공포는 아마도 ‘마지막에 대한 두려움’일 거다.

세월호참사가 난 지난 2014년 4월 16일 이후 세월호 유가족들은 그런 두려움 속에 매일을 지내야 했다.

내 자식이 탄 배가 침몰하고 있을 때 어쩌지 못하는 무기력감, 혹시 살아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기대마저 무너지고 한 명 두 명 시신으로 올라올 때 이들 가족들의 두려움은 바뀌었다.

시신을 찾은 가족들이 실내 체육관을 떠나가고 그들의 자리가 유난히 훤하게 눈에 들어오던 날에 그들은 말했다.

"내가 마지막이 될까 두려워요." 그래서 미수습자 가족들의 바람은 하루 빨리 시신을 찾아서 유가족이 되는 것이었다.

지난 3월 31일, 약 3년 만에 세월호가 인양되어 목포신항에 돌아온 뒤에 선체 수색이 진행되었고, 그런 과정에서 4명의 미수습자의 유해가 수습되었다.

유해를 수습한 미수습자 가족들은 미수습자임이 확인된 순간부터 그들이 소원하던 유가족이 되었다.

나머지 5명의 미수습자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다.

단원고 허다윤, 조은화 학생의 가족들부터 목포신항을 떠났다.

이어서 이영숙 씨, 고창석 교사가 그곳을 떠나 장례 절차를 밟았다.

이제 5명의 미수습자 가족들이 목포신항에 남았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미치겠다"고 말하고는 한다.

지금까지의 시간도 피 말리는 시간이었지만 다른 미수습자 가족들이 유해를 찾아서 떠난 뒤의 외로움은 더 컸다.

누가 봐도 선체 수색이 거의 매듭지어 가는 과정인데도 아직까지 나머지 5분의 유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없고, 그럴 가능성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미수습자 다섯 가족들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제 날은 추워지고 목포신항에서 다시 기약 없는 네 번째 겨울을 보내야 할 상황이다.

그래서 그들도 목포신항을 떠나는 고민을 하게 되나 보다.

그들이 최종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언론에 그들이 목포신항을 떠난다는 소식이 아주 구체적으로 나오고 있다.

이 나라에서는 수백 명이 죽는 해상침몰 사고가 드물지 않게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 나라에서는 형식적인 수색을 서둘러 마치고 가족들에게 보상금 몇 푼 쥐어주고 서둘러서 그 참사들을 덮고는 했다.

그러므로 같은 유형의 참사는 되풀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이런 지금까지의 공식을 깼다.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지만 기어이 선체를 인양하고 선체에서 미수습자들을 수색해왔다.

시민들의 높은 공감대가 있어서 이런 일이 처음으로 가능했다.

이윤과 효율성보다는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냈다.

돌아오지 못한 다섯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마지막 순간을 보낸 것일까? 정부는 시신이 유실될 가능성이 없다고 했지만 해수부가 설치한 유실방지막은 형편이 없었다.

침몰 과정에서 그리고 그 뒤에도 급류에 휩쓸려 버렸을 가능성은 너무도 많다.

유해로나마 가족들 품으로 돌아올 수 없는 그들, 그리고 3년 7개월을 기다렸지만 한 조각 뼛조각조차 품에 안지 못하는 미수습자의 가족들의 고통을 나는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 것일까? 다섯 사람과 그 가족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 깊은 두려움과 슬픔과 절망에 대해서 공감하는 일이 어느 때보다 절실 때다.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빨리 결정하라’고 압박하는 짓은 말았으면 좋겠다.

어떤 이유로든 이 나라 정부는 더욱 더 그러면 안 된다.

그런 분위기 조성도 하면 안 된다.

아직 이들은 충분히 애도 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 가족들의 결정을 차분히 기다렸으면 좋겠고, 만약 가족들이 목포신항을 떠나기로 공식 발표를 한다면 그들의 곁을 조용히, 그러나 따뜻하게 지켜주는 일이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리라 생각한다.

‘마지막의 두려움’에서 다섯 가족들이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미수습자 가족들이 목포신항을 떠난다고 해도 남현철, 박영인, 양승진, 권재근, 권혁규를 기억할 것이다.

다섯 분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