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릿광대 나폴레옹’1870년 7월19일 프랑스가 프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보불(普佛)전쟁’으로 잘 알려진 이 전쟁에서 프러시아는 어른이 아이의 팔목을 꺾듯 승리했다.

그처럼 쉽게 무너질 프랑스가 먼저 선전포고를 한 점이 새삼 눈길을 끈다.

그것은 당시 프랑스를 통치하던 나폴레옹 3세와 프러시아를 사실상 움직였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재상의 너무 현격한 능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을 이룩한 ‘철혈(鐵血)재상’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런 군국주의자가 있는 자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없는 자들을 보살펴야 한다며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한 ‘철혈(哲血)재상’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음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당시는 그의 무서움이나 위대함이 그처럼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특히 ‘나폴레옹’이라는 자신의 거창한 이름에 눌린 나폴레옹 3세에게는 심했다.

그는 어쩌면 나폴레옹 1세를 열심히 추종한 면도 있었다.

외국의 일에 부단히 나선 것이 그렇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성과는 드물고 반감은 높았다.

멀리 멕시코의 일에 까지 나서 막스밀리안 1세를 후원하다 그만둔 바람에 그가 비극적인 처형을 당한 것이 그렇다.

반면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에만 기를 집중해 가장 큰 걸림돌인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최후의 관문인 프랑스에 싸움을 걸도록 유도했고 프랑스는 그 낚싯밥을 물었다.

빅토르 위고는 "나폴레옹의 가장 큰 비극은 워털루 패배가 아니라 어릿광대가 그의 이름을 빌려 권좌에 오른 것"이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