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 그렇다.

그 느낌은 바로 좌절이었다.

비록 그때는 좌절이라는 말을 몰랐을 테지만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 해마다 6월이 오면 나는 좌절했다.

좌절의 이유는 온 땅을 지배하고 있는 눅눅한 지루함과 끈질긴 무료함. 이것도 힘든데 더 힘들 게 하는 것은 바로 변화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좌절의 원인은 장마였다.

장마는 자그마치 한 달이나 계속되었다.

그 한 달이 얼마나 길었는지 모른다.

중학교 2학년부터는 좌절하지 않았다.

1학년 2학기 국어 시간에 황순원의 『소나기』를 배웠다(요즘에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 소설의 배경은 사실 가을이다.

이야기는 한여름에 시작하지만 극적인 장면은 모두 가을에 일어난다.

하지만 중학생은 오직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만 생각하는 존재들이므로 상관없었다.

2학년이 되자 장마철이 되면 도라지색 옷을 입은 소녀와의 짧은 사랑을 상상하곤 했다.

우리 동네에 징검다리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땐 왜 그리도 장마가 짧았는지… 가만 생각해 보면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장마가 없었던 것 같다.

설마 그랬을 리가 없지만 말이다.

아마도 장마를 느낄 겨를도 없이 공부에 매진했든지 아니면 이제는 장마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호르몬이 시키는 대로 에너지를 맘껏 발산했을 것이다.

대학 시절 장마가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도 장마를 내 머리와 가슴 속으로 깊숙이 넣은 존재는 문학가였다.

윤흥길. 그의 소설 『장마』는 전쟁이라고는 경험해보지 못한 나를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비극 속으로 몰아넣었다.

주인공 소년은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를 모시고 산다.

한집에 사는 두 노인네는 의좋은 사돈 간이다.

그런데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던 어느 날 밤, 국방군 소위로 전쟁터에 나간 외삼촌이 전사했다는 통지가 왔다.

이날부터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외할머니는 빨갱이는 다 죽여야 한다고 저주했다.

문제는 삼촌은 인민군이었으며 인민군이 퇴각하자 삼촌은 빨치산이 되었다는 것. 할머니는 빨치산 아들의 귀환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국방군 아들을 잃은 외할머니와 빨치산 아들을 기다리는 할머니. 두 사람은 마치 각자의 불행이 상대방에게 있는 것처럼 서로를 미워했다.

둘 사이의 긴장과 불화만으로도 힘든 소년에게 맥고모자를 눌러 쓴 사내가 나타났다.

초콜릿이라는 작은 유혹에 넘어간 소년은 삼촌이 집에 다녀간 사실을 발설하고 아버지는 지서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이 모든 게 장마 중에 일어난 일이다.

난데없이 구렁이가 등장한다.

애들의 돌팔매에 쫓겨 집안으로 들어온 구렁이를 보고 할머니는 졸도한다.

이때 외할머니가 감나무에 올라앉은 구렁이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말을 건네더니, 할머니 머리에서 빠진 머리카락을 불에 그슬린다.

냄새를 맡은 구렁이는 땅으로 내려와 대밭으로 사라진다.

구렁이는 삼촌의 변신이다.

삼촌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주는 외할머니를 보고 할머니는 외삼촌과 외할머니에 대한 증오를 거둔다.

할머니는 외할머니와 화해하고 곧 숨을 거둔다.

그리고 장마가 걷힌다.

장마와 구렁이. 6월 하순에서 7월 중순까지의 한 달은 장마와 구렁이의 계절이어야 한다.

구렁이는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존재지만 장마는 정말 그립다.

작년에는 6월18일에 장마가 시작되어 7월30일에 끝났다.

초여름에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올해에는 아직 장마가 시작되지 않았다.

기상청은 지난 5월 제주는 6월17일, 남부지방 6월20일, 중부지방에서는 6월24일에 장마가 시작되어 7월21일에서 26일 사이에 차례로 장마가 그칠 것이라고 예보했지만 어긋났다(딱히 기상청의 잘못이 아니다). 다행히 오늘부터 제주에 장마가 시작한다고 한다.

제발 장마가 장마답게 오래 계속되어 가뭄이 해갈되기 바란다.

장마는 어린 아이에게는 눅눅하고 무료한 계절이며, 청소년은 사랑을 꿈꾸고 에너지를 발산하는 시기다.

그리고 어른들은 갈등을 해소하기 좋은 때다.

장마는 아들을 잃은 두 할머니도 화해하는 계절이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역사상 유례없이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만 아직 내각 구성도 마치지 못했다.

사드, 교역, 위안부, 청년 일자리 등 조속히 처리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다.

지난 정권의 무능과 탄핵정국 속에서 멈춰버린 국정이 속히 정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장마가 끝나기 전에 장관 임명이 끝나고 추경예산안이 통과되어 뜨거운 여름에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올해도 최근 몇 년처럼 어느 날 문득 장마가 끝났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당황하고 싶지는 않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