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중년들의 다시 부르는 희망가"인간의 영혼은 위장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소설가 찰스 부코스키의 이 말에 가슴 어딘가 먹먹해진다면 아마도 IMF를 겪은 세대일 가능성이 크다.

지금부터 20년 전, 그때의 청년들은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광경을 속절없이 지켜봤다.

‘먹지 못하고 이상과 가치만으론 버틸 수 없다’는 걸 실존적으로 절감했다.

다행히 힘든 시간은 지났고, 상처도 많이 아물었다.

새파란 뺨의 청년은 자신의 한 뼘 땅을 일궈내는 사이 머리 끝자락이 희끗해졌다.

지금 힘든 때를 보내는 청년들에게 조금 할 말도 생겼다.

‘꼰대’로 오해받기 싫다며 손을 젓는 세 명의 중년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세월을 견딘 힘을 물어봤다.

말이 조금 쓰게 느껴진다면 세월을 이겨낸 지혜가 섞여있기 때문일 거다.

◆"우리 땐 휴학했다 영영 못 본 대학 친구도"IMF 관리체제 직전 한국은 거품의 끝자락에 있었다.

돈이 구석구석 굴러다니며 사회에 열기를 공급했다.

원서만 내면 취직시켜주겠다는 기업들이 줄을 섰고, 대학생들은 너도나도 해외연수를 다녀왔다.

너도나도 해외 명품 하나쯤은 갖고 있었다.

원화가치가 심하게 고평가돼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돈이 땅으로 꺼지듯 사라졌다.

1997년 11월 우리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면서다.

처음에는 다들 어리둥절했다.

이듬해 들어 기업들이 줄줄이 부도를 내고 문을 닫자 국민들은 그제야 충격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언론에선 생계 고민 끝에 자살을 택한 일가족의 얘기가 매일처럼 보도됐다.

지금은 직원 여럿을 거느린 어엿한 경영 컨설팅 업체 대표인 이만호(45)씨는 1998년 고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 회사가 부도 났다는 말을 들었다.

"공부하면 안 되겠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법조인의 꿈을 접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현재 경찰인 상동규(40) 경사 역시 비슷했다.

상씨는 대학 4년 내내 IMF에 짓눌려 살았다고 기억했다.

주변에선 휴학생이 속출했다.

가세가 기운 일부 친구들은 영영 대학에 돌아오지 못했다.

아르바이트와 장학금을 위해 정신없이 살았다.

그 역시 가스 배달과 태권도장·수영장 강사를 하며 버텼다.

등록금 때문에 ROTC로 대학생활을 보냈다.

무역회사 대표인 도경현(42)씨는 군대에서 IMF 구제금융 소식을 들었다.

제대한 때가 1998년 9월. IMF 여파로 경기는 ‘한겨울’이었다.

경영학과를 다니던 도씨는 오히려 이때 신문기사를 꼼꼼하게 읽으며 공부했다고 한다.

그는 "다들 힘들다, 위기가 왔다고 했지만 다시 기회가 올 거라 여겼다.금 모으기 운동을 하는 걸 보고 우리는 이겨낼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고 기억했다.

◆"힘들 때에 기회를 봐야"IMF의 겨울은 생각보다 빨리 흘러갔다.

2001년 8월 불과 4년여 만에 차입금 전액인 195억달러를 조기 상환했다.

역사상 가장 빠르고 성공적인 대출 프로그램 졸업이라는 평가가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이어 ‘닷컴 버블’로 시작된 경기가 사회 전체로 확산하는 것처럼 보였다.

세 명의 중년은 그때 다른 교훈을 얻었다.

이 대표는 우리나라가 IMF 관리체제를 끝낼 즈음 은행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경기가 힘들 때 입사하다보니 동기들의 ‘스펙’이 이전보다 놀랄 만큼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적성을 생각지 않고 ‘일단 취직하고 보자’는 생각에 취직을 하다보니 은행 동기의 3분의 1은 얼마 못 견디고 회사를 그만뒀다.

이 대표는 대기업을 포함해 15년가량 직장 생활을 하며 경험을 쌓고나서 자신만의 회사를 차렸다.

이 대표는 한 달 가운데 절반이 넘게 중국에서 살기도 하며 사업을 일궜다.

그는 "살다보면 돌발상황은 있다.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게 있을 수 있다.기다려야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상 경사는 장교로 제대 후 보험회사에 들어갔다.

군을 상대로 보험영업을 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다 영업하러 만난 경찰 친구에게서 오히려 "경찰이 돼라"고 설득을 당해버렸다.

6개월을 고민하다가 3년 내 합격을 목표로 짐 싸들고 노량진 고시촌에 들어갔다.

운 좋게 그해 합격했다.

딱 서른살에 임용됐다.

그는 "포기하면 이도저도 안 된다"고 했다.

놀고 싶은 마음이야 같지만 자신과 싸움에서 이겨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했다.

도 대표는 IMF 시절에 증권정보 사이트를 차렸다.

도 대표가 차린 ‘머니팝닷컴’은 회원이 10만명에 달할 만큼 잘됐다.

하지만 그는 어느 순간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는 판단을 내리고 사이트를 접고 무역상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영어와 일본어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해서다.

이후 국내의 한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일본의 소니 본사로 옮겼다.

그의 카운터파트는 애플 본사. 그의 제안에 따라 애플이 노트북 LCD 필름을 변경하면서 10년째 적자를 보던 소니 사업부는 흑자로 돌아섰다.

소니의 해당 사업부는 지금도 흑자라고 한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독립을 결정했다.

도 대표는 "당시 내 길이 무엇인가를 끝없이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불혹을 넘어선 이들이 지나온 삶의 궤적과 서로가 얻은 인생 교훈은 달랐지만 한결같이 입을 모은 부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