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사진신부 천연희의 이야기 / 일제 압제 피해 희망 품고 떠났지만 / 두 번의 이혼… 아이들과 힘겨운 생활 / ‘사진신부 천연희’의 자전적 기록 / 자필노트 7권·녹음테이프 남겨 / 이민사·여성사에도 중요한 자료로하와이 사진신부 천연희의 이야기/문옥표·이덕희·함한희·김정숙·김순주 지음/일조각/5만원"하루는 체전부(우편배달부)가 무엇을 가지고 왔다.풀어 보니 사진이다.그 사진은 미국 영지인 포와(하와이)에서 왔다.이름은 길차옥 씨고 나이는 30여세다.사진혼인할 신랑의 사진이다."경남 진주 출신인 천연희(1896∼1997)는 1915년 6월20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그의 나이 19세로, 마우이섬 파이아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길찬록의 ‘사진신부’로 이민길에 오른 것이다.

천연희는 27살 연상인 길찬록과 호놀룰루의 한인감리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사진신부’는 미국으로 노동이민을 떠난 한국 남성과 사진만 교환해 부부의 연을 맺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인 1910∼1920년대 한국에는 천연희처럼 사진신부가 되어 미국으로 떠난 여성이 600∼1000명에 달했다.

천연희는 출국 당시의 심정에 대해 "그때는 외국 갈 희망에 사랑이고 무엇이고 아무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고 자유의 나라에 갈 생각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천연희는 미국으로 떠나고 50여년이 지난 1971년부터 자신의 일생을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학교 교사였던 딸 메리의 도움을 받아 육성으로 이야기를 녹음하기도 했다.

1997년, 101년의 삶을 마친 천연희는 자필 기록 노트 7권과 육성 녹음테이프 24개를 남겼다.

훗날, 이들 기록을 ‘천연희 기록’이라 불렀다.

신간 ‘하와이 사진신부 천연희의 이야기’는 천연희가 남긴 기록들을 현대어로 옮기고 해제한 책이다.

희망을 품고 자유의 나라로 떠난 천연희의 삶은 곡절이 많았다.

그는 사진만 보고 결혼상대로 결정한 길찬록과의 결혼에 실패했다.

천연희는 길찬록과의 사이에서 세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길찬록은 술을 좋아하고 경제능력이 부족했다.

결국 천연희는 남편과 별거하고, 홀로 아이들을 키웠다.

그러던 중 병에 걸린 자신을 지극히 돌봐주고 나이 어린 자녀들을 챙겨주는 박대성을 만나게 된다.

천연희는 박대성과 두 번째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박대성과의 결혼생활도 오래 이어가지 못했다.

천연희는 박대성과도 세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박대성이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이들을 차별하는 등 불화가 잦았다.

결국 천연희는 두 번째 이혼을 결심한다.

이국 땅에서 여섯명의 아이를 홀로 키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천연희는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바느질부터 세탁, 카네이션 농사, 여관업 등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천연희는 미국인 남성과 세 번째 결혼을 한 뒤에야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그는 자식을 모두 공립고등학교에 보냈고, 교통사고로 17세에 세상을 뜬 장녀를 제외한 5명의 남매를 혼인시켰다.

세 번째 남편인 기븐이 사망한 뒤에는 홀로 여생을 보냈다.

천연희가 남긴 기록들은 일제강점기 미국으로 떠난 한인들의 인식을 엿보게 한다.

"제국 정치의 반대자라거나 도모자라고 하고 옥에 가두고 추달하여 병신을 만들어 정신병자 모양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등신을 만들어 버렸다.그와 같이 자유 없는 나라 백성은 참으로 불쌍하였다.이 모든 것이 내 마음에 상처가 되어 자유 세상을 찾게 되었다."그의 생애와 기록은 사진신부 연구뿐만 아니라 이민사와 여성사의 관점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이덕희 소장은 천연희 기록의 의의에 대해 "사진신부 가운데 자신의 이야기를 친필로 남긴 여성은 단 두 명밖에 없다"며 "한인 여성들이 일본인 여성과 달리 조그만 가게보다는 하숙집이나 여관을 운영하고자 했다는 점 등이 밝혀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구한말 진주 방언과 한국어 단어가 사용됐고, 천연희가 들리는 대로 영어 단어를 표기했다는 점에서 언어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자료"라고 덧붙였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