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봉제산업, 활로는 무엇인가‘봉제의 품격, 라성사.’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자리 잡은 1000여개의 봉제업체 중 간판에 ‘봉제의 품격’이라는 수식어를 당당하게 쓴 라성사에는 진상길(60) 대표의 자부심이 녹아 있다.

열아홉살에 광주에서 상경해 미싱 시다(보조)로 처음 봉제업에 뛰어든 진 대표는 남성 양복 상의만 41년째 만들고 있다.

"동대문이나 종각에 나가면 내가 만든 양복을 입은 멋쟁이 신사들이 많았어. 손 바늘로 한땀 한땀 만든 옷 입고 고향 내려가서 친구들과 가족 앞에서 ‘서울신사’라고 자랑도 많이 했지."잠시 옛 생각을 떠올리던 진 대표는 "양복을 찾는 사람이 많아서 IMF 외환위기 때도 거뜬했다"며 "미싱과 재단 일을 배우는 젊은 인력이 줄고 의류업체 생산기지가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많이 빠져나간 2000년대부터 사업이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한때 9명이 일하면서 한 달에 1000벌이 넘는 옷을 도매상에 팔았던 라성사에는 현재 4명만이 남아 있다.

그는 "봉제 기술 덕분에 자식 둘 다 키우고 사장 소리도 듣고 있지만 뒤를 이어서 할 사람이 없으니 아들이라도 데려와야 할 것 같다"며 하소연했다.

1970∼1980년대 대한민국 수출을 이끌었던 봉제산업이 영세화와 인력난, 해외 아웃소싱으로 삼중고의 위기를 겪고 있다.

특히 창신동 봉제 골목 곳곳에 붙은 미싱사와 시다 등을 구한다는 구직광고는 인력난에 허덕이는 봉제업체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서울시는 위기의 봉제산업을 패션과 융합한 패션제조업으로 탈바꿈시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동대문패션관광특구’를 중심으로 디자인과 제작, 유통, 판매까지 결합한 패션제조업으로 봉제산업을 부흥시키겠다는 것이다.

16일 서울시에 따르면 2014년 등록사업체를 기준으로 1만2279개 봉제업체에서 7만7000명이 종사 중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 중 9305개 업체가 8개 자치구(종로·성북·동대문·강북·도봉·중랑·성동·중구)에 몰려 있다.

최근 10년 동안 봉제업계는 종사자 감소로 인한 사업체의 영세화가 심화하고 있다.

시에 따르면 2009년 종사자가 32.9명에 달하던 법인사업체는 2014년 22.5명으로 6년 만에 10명이 줄었다.

전체 업체 중 90%를 차지하는 개인사업체의 업체당 종사자는 2008년 5명을 기록한 뒤 2014년 4.3명으로 줄어들었다.

5인 이하 개인사업체가 공정별로 분업해 옷을 만드는 시스템 속에서는 개인사업체 구매력이 낮아 납품 가격을 올리기 어렵다.

진 대표는 "중국과 동남아에서 낮은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값싼 옷이 대규모로 들어오니 양복 상의 납품 가격이 20년 전보다 오히려 지금이 못하다"고 지적했다.

시는 봉제업체 경쟁력 강화를 위해 지난해 6월 ‘동북권 자치구 패션봉제산업 발전협의회’의 8개 자치구와 협약을 맺어 권역별 맞춤 지원에 나섰다.

도심권·동북권·서북권·남북권으로 구분해 의류생산거점에 패션지원센터를 설치해 영세한 봉제업체에 인력을 연결하고 판로 확보 등을 돕는다.

패션디자이너 창작과 작품 제작을 지원하는 서울창작스튜디오와 서울패션위크와 연계한 봉제산업의 고부가가치화도 추진한다.

패션을 전공하는 40여명의 청년은 다음 달부터 ‘소잉마스터 아카데미’에 참가해 창신동 봉제장인들로부터 10∼20주 동안 봉제기술을 전수한다.

시는 지난 11일 개관한 창신동 ‘이음피움 봉제역사관’을 통해 시민에게 봉제를 알리고 패션·봉제 업계 종사자의 활발한 교류를 지원한다.

김경민 서울대 교수(환경대학원)는 "패션 산업의 경쟁력을 평가할 때 패턴과 샘플 제작 등 고급 봉제기술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며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 경쟁력을 갖춘 중구 신당동을 비롯해 구별 봉제산업 특성에 맞는 전략을 펼친다면 동대문패션관광특구를 중심으로 한 패션제조업의 경쟁력을 올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이창훈 기자 corazo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