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조사에 충실히 임하겠다."국회의원들에게 불법 정치후원금을 제공했다는 의혹을 받는 황창규 KT 회장은 17일 경찰에 출석해 의례적인 말만 남겼다.

이어지는 취재진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조사실로 향했다.

황창규 회장은 이날 오전 9시 32분쯤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 본청에 출석했다.

앞서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황창규 회장을 정치자금법 위반 피의자 신분으로 이날 오전 10시까지 출석하라고 통보했다.

KT 현직 최고경영자(CEO)가 경찰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한 사례는 지난 2002년 민영화 이후 처음이다.

담담한 표정으로 취재진 앞에 선 황창규 회장은 '혐의를 인정하느냐'는 질문에 "경찰 조사에 충실히 임하겠다"고 말했다.

불법 정치자금을 건넬 당시 '지시하거나 보고받은 사실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조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경찰은 KT 임원들이 법인카드로 상품권을 구매한 뒤 이를 현금화해 국회의원들에게 '쪼개기' 방식으로 장치자금을 기부한 정황을 포착하고 KT 본사와 자회사 등을 압수수색한 뒤 관계자들을 차례로 조사해왔다.

경찰은 KT 전·현직 임원들이 지난 2014~2017년 국회의원 90여명의 후원회에 KT 법인자금으로 4억3000여만 원을 불법 후원했다는 혐의와 관련해 황창규 회장이 이를 지시하거나 보고받는 등 관여한 사실이 있다고 보고 있다.

또 기부금은 KT가 주요 주주인 인터넷 전문은행 케이뱅크 관련 입법 사안을 다룬 정무위원회, 통신 관련 예산·입법 등을 담당하는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현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등에 흘러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날 황창규 회장을 불러들인 경찰은 불법 정치 후원금을 제공하는 과정에 황창규 회장이 어느 수준까지 관여했는지, 기부금을 낸 목적은 무엇이었는지 등을 중점적으로 확인할 계획이다.

또 당일 조사 이후 수사 상황에 따라 추가 소환 조사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이동통신 업계에서는 이번 황창규 회장의 소환 조사와 관련해 KT 수장들의 잔혹사가 이번에도 재연될지 주목하고 있다.

KT는 2002년 민영화된 이후 황창규 회장 전임 회장들이 비리 등의 혐의로 불명예 퇴진하는 흑역사를 갖고 있다.

남중수 전 사장은 납품 업체 선정 과정에서 3억 원을 받은 혐의로, 이석채 전 회장은 배임 혐의와 회삿돈으로 11억 원대 비자금을 만든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물러났다.

한편 이날 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된 KT민주화연대는 경찰청 앞에서 황창규 회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검경은 정치자금법 위반 피의자인 황창규 회장을 즉각 구속 수사해야 한다"며 "이번 불법 정치자금 사건과 관련된 KT 임원들도 즉각 퇴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