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배우 고(故) 최은희 발인이 19일 오전 8시30분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울 성모 장례식장에서 진행됐다.

고인은 영화감독인 첫째 아들 신정균 씨와 18일 오후 늦게 미국에서 건너온 둘째 상균씨 등 가족, 그리고 신성일, 신영균, 문희, 이장호, 한지일, 황기성, 최하원 감독 등 그를 기억하는 수많은 영화인들의 애도 속에 영면의 길을 떠났다.

고 최은희의 삶은 두번의 이혼과 두번의 결혼, 납북과 탈북 등 말그대로 불꽃처럼 살다간 한편의 드라마였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삶을 살았다.

1942년 연극무대를 발판삼아 1947년 '새로운 맹서'로 스크린에 데뷔한 뒤 김지미 엄앵란과 함께 50년대 원조 여배우 트로이카로 명성을 날렸다.

엄앵란이 "언니의 연기를 보며 배우의 길을 굳건히 다졌다"고 할만큼 같은 트로이카 중에서도 동시대 여배우들로부터 존경받는 맏언니였다.

최은희를 정점으로 원조 여배우 트로이카는 60년대 초중반까지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이끌었고, 이후 문희 윤정희 남정임(60년대),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70년대), 원미경 이미숙 이보희(80년대), 심혜진 강수연 최진실(90년대 초중반), 심은하 전도연 고소영(90년대 후반 이후)으로 이어졌다.

최은희는 18살의 나이에 영화촬영 감독과 한차례 결혼한 뒤 1953년 영화 '코리아'에 출연하며 신상옥 감독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이듬해인 1954년 결혼해 신 감독과 130여 편의 영화를 함께 만들며 활약했다.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작들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최은희는 신 감독이 여배우 오수미와 내연관계로 발전하면서 이혼한 뒤 1978년 홀로 홍콩에 갔다가 북한 공작원에 납치된다.

최은희의 행방을 쫒던 신 감독도 같은 해 홍콩을 방문했다가 납북돼 두 사람은 5년만인 1983년 북한에서 극적으로 재회한다.

최은희와 신 감독은 당시 김정일의 영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환대로 영화사를 이끌며 북한에서 활발히 작품 활동을 펼쳤다.

최은희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이듬해인 1986년 둘은 영화제 참석차 중간 기착지였던 오스트리아 빈에서 극적으로 망명에 성공한다.

미국 대사관을 통해 10년간 망명 생활을 이어오다 1999년 영구 귀국한다.

납북 이후 망명생활까지 포함해 무려 20여년만의 귀환이었다.

귀국후엔 안양영화예술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후배를 양성했고, 극단 '신협' 대표로 취임했다.

2007년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을 펴내며 화제를 모았고, 지난해 11월에는 한국영화계의 거장이자 남편 고 신상옥 감독을 기리는 '제1회 신필름 예술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했다.

최은희는 2006년 부군 신상옥 감독 타계 후 오랜 투병생활을 이어왔다.

신 감독을 먼저 떠나보낸 뒤 허리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악화됐고, 일주일에 세 번씩 신장투석을 받아왔다.

생전 각막 기증을 약속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각별한 자식사랑으로 알려진 가운데 슬하에 2남2녀를 뒀지만 신정균(영화감독) 신명희씨는 입양했고, 둘째아들 상균(미국거주)씨와 승리씨는 신상옥 감독과 오수미씨 사이에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