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장자동화 기기를 만드는 A사 공장 곳곳에 최근 빨간색 압류 딱지가 붙었다.

중소기업 B사로부터 '하도급 갑질'을 당해 한국공정거래조정원(이하 조정원)과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에 신고했지만, 사건 처리가 늦어져 심각한 자금난을 겪게 됐기 때문이다.

B사는 부당한 계약을 앞세워 하도급 업체 A사에 10여 차례나 제품 사양 변경을 요구하고 계약서면도 발급하지 않았다.

결국 모든 비용을 떠안게 된 A사는 도산 위기에 처했다.

사회 곳곳에서 '대기업 갑질' 폭로가 잇따르며 '을(乙)의 반격'이 시작됐다지만 '경제 먹이사슬'의 '갑-을-병' 중 '병(丙)'에 해당하는 소규모 하도급 업체에는 딴 나라 얘기다.

언론과 일반인 관심이 온통 '갑'인 대기업에만 쏠려 있어 '을'인 중소기업에 갑질 당한 '병'들은 하소연할 곳조차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갑을 관계'에 따른 수직적 위계 구조가 대·중소기업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중소기업과 소규모 하도급 업체 간에도 형성돼 있다는 점이다.

하청·재하청으로 이어지는 피라미드 구조의 최하단에 있는 하도급 업체들은 중소기업 갑질 역시 대기업 못지않게 심각하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중소기업의 불공정한 행위를 정부 당국에 신고해도 사건 처리 속도가 지지부진해 이에 따른 경영난으로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다.

하도급 업체들은 또 갑질 피해자이지만 혹시라도 영업상 불이익이 생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담당 공무원 눈치까지 봐야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는 신세다.

앞서 언급한 하도급 업체 A사는 공정위의 분쟁 조정 처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빚 독촉과 압류에 시달리는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A사 대표는 "공정위 결과가 빨리 나와야 중소기업을 상대로 소송 등 '플랜 B'에 착수할 수 있는데 정부 당국의 대응이 굼뜨다"며 "언론에 '을의 갑질'을 제보해도 대기업이 아니라는 이유로 대부분 주목받지 못하고 묻히기 일쑤"라고 하소연했다.

중소기업 갑질의 실상을 알리려고 노력해도 별다른 관심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경제 검찰'로 불리는 공정위 판단이 나오기 전에 갑질 기업을 상대로하는 소송도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자금이나 인맥 네트워킹이 취약한 소규모 하도급 업체들로선 소송에 따른 결과를 예단하기 어렵고 시간과 비용도 많이 든다.

하도급 업체들은 소송을 신속히 해결하기 위해 관계 당국에 신고하고 청와대 국민청원에도 글을 올려 공론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마저도 대기업 갑질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갑질 피해자인 하도급 업체들은 이같은 적극적인 행동이 오히려 담당 공무원들의 심기를 건드려 사업상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업계 관계자는 "'을'도 아닌 '병'의 입장에서 갑질 당한 것도 서러운데 공무원 눈치까지 봐야하는 '이중고'가 더 견디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정부가 '을'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두 팔을 걷어붙이고 갑질 근절에 범정부 차원의 역량을 집중하는 것은 박수칠 만하다.

그러나 '을' 횡포에 눈물 흘리는 '병'들이 피부로 느끼는 체감도는 미약한 상태다.

'갑을 관계'를 다루는 공정위는 지난해 6월 김상조 위원장 취임 이후 민원·신고 신청이 50% 이상 증가하고 과징금 부과액도 역대 최대인 1조 원을 넘어서는 등 소기의 성과를 거뒀지만 '놀라운 성적표'의 뒷맛은 씁쓸하기만 하다.

먹이사슬 최하위 '병'들의 슬픈 사연이 각종 장벽에 가로막혀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하는 것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강자에서 약자로 향하는 갑질 횡포 구조에서 신음하는 '병'들이 정당한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더 많은 관심과 촘촘한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