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단 검사에서 검찰총장, 법무부장관, 국회의원, 대통령비서실장까지···.그야말로 승승장구하는 삶이었다.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얘기다.

그는 박근혜정부에서 발탁돼 ‘왕실장’으로도 모자라 ‘기춘대원군’으로 불릴 정도로 실세 중의 실세였다.

그랬던 유능한 법조 엘리트는 ‘문화융성’을 4대 국정 기조 중 하나로 내세운 정부에서 문화계 지원배제명단(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한 혐의로 항소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서울 송파구 서울 동부구치소에서 ‘영어(囹圄)의 몸’으로 지내다 562일 만에 구속 기간 만료로 지난 6일 석방됐다.

김 전 실장의 블랙리스트 혐의는 대법원의 최종판단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 재판을 미루는 대가로 법관 해외 파견을 지원받았다는 ‘재판 거래’ 의혹에 김 전 실장이 관여했다는 의혹이 새롭게 불거진 상태여서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게 검찰 입장이다.

김 전 실장이 ‘서초동’과의 인연을 끊기는 당분간 어려울 전망이다.

11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신봉수)는 김 전 실장에게 14일 출석해 조사를 받으라고 통보했다.

김 전 실장은 ‘건강상 이유’를 들어 지난 6일 소환에 불응한 바 있다.

구치소 수감 중에도 소환 통보를 받았지만 불응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김 전 실장이 또다시 소환에 불응한다면 3번째인 만큼 체포영장을 발부받을 방침이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청와대에 법관 해외 파견을 청탁하는 대가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미쓰비시중공업 등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지연시켰다고 의심한다.

행정처가 재판 일정을 지연시킨 이유로 "한일관계 개선을 추진하는 정부에 ‘절차적 만족감’을 줄 필요가 있다"고 내부 보고서에 적은 것은 익히 알려진 바다.

특히 검찰이 이달 초 외교부 압수수색 과정에서 확보한 문건은 2013년 10월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 청와대에서 주철기 당시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만나 대법원에 접수된 피해자들 사건의 진행 경과와 향후 방향 등을 논의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주 전 수석은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에게 이를 보고했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위법성 여부를 논하기에 앞서 헌법상 삼권분립 원칙을 법원이 앞장서서 무너뜨렸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검찰은 지난 사법부의 ‘재판 거래’ 의혹 수사 반경을 박근혜정부 청와대로 넓히는 모습이다.

지난 정권의 실세로 꼽히는 김 전 실장은 당연히 수사 대상이다.

앞서 블랙리스트 사건 1심에서 자신을 ‘망한 왕조의 도승지’에 비유하면서 대통령을 제대로 보필하지 않은 잘못을 인정했던 김 전 실장이 감수해야 할 정치적 책임이 아직 남아있다는 뜻이다.

배민영 기자 goodpoint@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