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청나라 견문록’ 꼼꼼히 기록 / 남북 합동 답사 여정 마련되길 기대남과 북이 본격적인 평화의 시대로 나아가는 흐름이 이어지면서 한반도의 평화 정착이 가시화하고 있는 듯하다.

남과 북의 본격적인 경제협력이나 금강산 관광 재개에 대한 국민의 기대감도 크다.

문화재의 남북 공동 발굴 조사와 연구 등도 활발하게 추진돼야 할 사업이다.

이에 남과 북이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주요 여정을 답사하는 프로그램을 추진하면 어떨까 싶다.‘열하일기’는 조선후기 북학파 학자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1780년(정조 4) 청나라를 다녀온 후 쓴 기행문으로 1783년에 완성됐다.

청나라 건륭제의 고희연을 맞아 사신단의 일원인 팔촌형 박명원의 자제군관(子弟軍官)의 신분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그 견문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박지원 일행은 청나라 수도 연경에 들어갔는데, 당시 건륭제가 열하의 피서산장에서 휴가 중이어서 열하까지 갔기 때문에 제목을 ‘열하일기’라 한 것이다.

필자는 두 차례에 걸쳐 ‘열하일기’ 현장 답사를 다녀왔지만, 모두 중국의 단동에서 출발한 여정이었기에 직접 압록강을 건너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박지원은 1780년 5월 말 한양을 떠났고,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넜다.

‘열하일기’의 6월 24일 기록에는 "아침에 보슬비가 온종일 뿌리다 말다 했다.오후에 압록강을 건너 30리를 가서 구련성(九連城)에서 쉬었다.밤에 소나기가 퍼붓더니 이내 개었다.앞서 용만(龍灣) 의주관(義州館)에서 묵은 지 열흘 동안에 방물(方物·지방 특산물)도 다 들어왔고 떠날 날짜가 매우 촉박했는데, 장마가 져서 두 강물이 몹시 불었다.(…) 탁류가 하늘과 맞닿았다.이는 대체로 압록강의 발원(發源)이 먼 까닭이다.당서(唐書)에는, "고려의 마자수(馬?水)는 말갈의 백산(白山)에서 나오는데, 그 물빛이 마치 오리 머리처럼 푸르러서 ‘압록강’이라 불렀다" 했으니, 백산은 곧 장백산을 말함이다.산해경에는 이를 불함산이라 했고, 우리나라에서는 백두산이라 일컫는다.백두산은 모든 강이 발원되는 곳인데, 그 서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곧 압록강이다"고 하여 압록강과 백두산의 연원을 설명하고 있다.

압록강을 건너 중국과의 국경에 이르렀을 때의 모습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조반을 먹은 뒤에, 나는 혼자서 먼저 말을 타고 떠났다.말은 자줏빛에 흰 정수리, 날씬한 정강이에 높은 발굽, 날카로운 머리에 짧은 허리, 더구나 두 귀가 쭝긋한 품이 참으로 만리를 달릴 듯싶다.창대(박지원의 마부)는 앞에 서고 장복(박지원의 하인)이는 뒤에 붙었다.안장에 걸린 양쪽 걸랑에는 왼쪽은 벼루, 오른쪽은 석경과 붓 두 자루에 먹 한 장, 공책 네 권에 ‘이정록(里程錄)’ 한 축, 행장이 이렇듯 간편하니 국경의 세관 검사가 엄하다 하더라도 염려가 없다"고 한 기록에서는 국경을 넘는 박지원의 행장이 매우 간소했음과 함께 필기구과 공책 네 권을 꼭 챙긴 메모광의 면모를 접할 수 있다.

박지원은 8월 1일 연경에 도착한 후 바로 건륭제가 있는 열하로 향해 8월 9일 도착했다.

사신단의 임무가 끝난 후인 8월 14일에는 다시 연경으로 왔고, 10월 27일 5개월이나 걸린 대장정을 마침내 마무리했다.

귀국길에도 역시 현재의 북한 지역인 육로를 거쳐 갔다.

‘열하일기’에는 박지원이 압록강을 건너는 과정부터 기록하고 있지만, 조선시대 연행사의 사행로가 한양, 고양, 파주, 장단, 평산, 황주, 중화, 평양, 안주, 선천, 철산, 의주, 압록강으로 이어지는 경로였음을 고려하면 박지원 또한 이 길을 따라갔을 것이다.

청나라에서는 요양, 심양, 거류하, 산해관, 계주, 연경(북경), 고북구, 열하로 이어지는 경로를 거쳐 갔음이 나타난다.

거리도 멀었고 끝없이 펼쳐지는 산과 강, 변화무상한 날씨로 힘도 들었지만, 벽돌 집, 수레의 이용, 귀마개 등 청나라의 신문물은 그를 기록의 세계로 안내했다.

꼼꼼하고 치밀한 기록은 조선 최고의 베스트셀러 ‘열하일기’의 완성으로 이어졌다.

북학(北學)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는 책이기도 한 ‘열하일기’의 기록을 따라 남과 북이 함께 하는 여정이 마련되기를 기대해 본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