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안경까지 쓰고 필기에 몰두하는 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이 보였다.

열일하는 국회의원이라니, 반가운 마음에 다가갔지만… 역시 그는 '노룩(No Look: 상대방을 보지 않는 것)'의 장인이었다.

11일 오전 국회에서는 외교통상위원회의 통일부 국정감사가 열렸다.

이날 외통위 소속 의원들은 감사에 집중하지 못했다.

원유철 한국당 의원은 회의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감은 채 졸기 시작했고, 김재경 한국당 의원은 SNS에 여념이 없었다.

이수혁·추미애 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주로 옆자리에 앉은 다른 의원과 잡담을 나눴다.

물론 한시도 집중력을 놓지 않고 감사에 임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감사가 시작된 뒤에야 관련 자료를 검토하느라 다른 의원의 질의와 조명균 통일부 장관의 답변을 듣지 못하는 것은, 국정에 별 관심이 없는 태도나 마찬가지처럼 보였다.

정양석 한국당 의원이 발언을 이어가는데, 옆에 앉은 김무성 같은 당 의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주변에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노룩' 상태로,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얼핏 이날 오가는 여러 의견을 필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김 의원은 휴대폰을 보거나 다른 의원과 대화를 나누는 이들과 달리, 오로지 감사에 몰두한 모범생을 연상케 했다.

'열심히 일하는 국회의원이란 바로 저런 모습이구나, 역시 6선 의원은 다르다.

' 필자는 새삼 감탄하며 김 의원이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김 의원은 다른 의원과 조 장관의 발언을 메모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겐 누가 무엇을 하든 상관없이,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김 의원의 책상에는 여러 기사 출력본이 펼쳐져 있었다.

국내 일부 언론과 미국 국무부 방송위원회가 운영하는 국제 방송 미국의 소리(VOA)의 보도 내용이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는 형광펜으로 강조표시를 해놨는데, 보좌진이 미리 준비해둔 것인지 본인이 직접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김 의원은 하단에 국회 로고가 있는 빈 종이에 눈에 잘 띄는 파란색 펜으로 긴 글을 적었다.

기사를 몇 번이고 다시 들여다보다가 고심 끝에 줄을 긋고 수정하기도 했다.

정오쯤에야 바쁘게 움직이던 김 의원의 펜이 멈췄다.

책상 위에는 파란 글씨로 채워진 A4용지 두 장이 놓였다.

큼직한 글씨 덕에 멀리서도 내용을 알아볼 수 있었는데, '자유한국당도 남북 간의 긴장 완화와 평화정착을 바람'으로 시작되는 글이었다.

김 의원이 온 신경을 집중한 글의 정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강석호 위원장이 '존경하는 김무성 의원님'을 부르자, 김 의원은 "수고가 많으시다"고 인사를 건넨 뒤, 방금 그 종이를 살짝 들어 세우고 그대로 읽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은 오직 종이쪽으로 고정됐다.

"우리 자유한국당도 남북 간의 긴장 완화와…."김 의원은 종이에 적힌 내용을 다 읽은 뒤에야 조 장관과 다른 의원들에 시선을 뒀다.

이어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24조치를 두고 '한국 정부는 우리의 승인(approval)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 언급한 사실을 들며 조 장관에게 "느낌이 어떠냐"고 물었다.

조 장관은 "제가 평가나 느낌을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답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평가가 아니라 느낌만 말하라"며 추궁했다.

김 의원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모욕적인 느낌이 들지는 않았느냐", "미국과 유엔 사령부의 승인 없이는 우리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게 냉엄한 현실이다", "대북제재 문제를 놓고 한미 간 균열이 큰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 등을 지고 북한 입장을 너무 많이 대변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경고성 발언이다" 등 비난을 이어갔다.

"원래 국정감사에선 첫 질문에 공을 제일 많이 들여. 모든 인상이 결정되는 중요한 순간이거든." 이같은 선배 기자의 통찰은, 직전까지 질문 내용을 준비하는 김 의원의 '벼락치기' 기술에 곧바로 민망해지고 말았다.

김 의원이 던졌던 질문은 평이했던 이날의 국감에서 화제가 될 것이 분명했다.

오후 2시 30분 국감이 재개됐지만, 정회에 앞서 이미 질의를 마친 김 의원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6선 의원의 노련함일까. 입안에 쓴맛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