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농사 지으며 학문연구 매진/ 극한 환경서도 좌절하지 않아지난 9일 전라남도 강진에서는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유배에서 풀려나서 강진을 떠나는 송별연 행사를 가지고, 200년 전 다산이 그랬던 것처럼 고향인 남양주 생가에 도착하는 행사가 진행된 것이다.

1801년 신유박해에 연루돼 강진으로 귀양을 간 정약용은 18년의 긴 유배생활을 마치고, 1818년 9월 2일(양력 10월 10일) 무렵 강진을 출발해 9월 23일쯤 고향으로 돌아왔다.

실학의 집대성자로 평가를 받고 있는 정약용은 물과 인연이 깊은 학자다.

고향인 마현(현 경기도 남양주시 능내)은 남한강과 북한강의 물길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근처이고, 유배지 강진도 바닷가가 빤히 바라다보이는 곳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흐르는 물처럼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800년에 일어난 정조의 승하는 정조의 총애를 받고 관료로서 승승장구하던 정약용의 인생에도 커다란 전환점이 됐다.

정조 사후 집권세력이 된 노론 벽파는 남인 탄압의 수단으로 천주교를 적극 활용했다.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로 이가환, 이승훈, 정약종, 권철신 등 300여명의 신도와 청나라 신부가 처형되고, 정약용은 처형만을 면한 채 경상도 장기로 유배를 갔다.

그런데 그해 9월 황사영이 조선 조정의 천주교 박해 상황을 중국 북경의 주교에게 보낸 이른바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나면서 정약용은 한양으로 압송됐다.

다시 유배길에 오른 정약용은 나주에서 형 정약전과 헤어져 강진으로 갔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갔다.

해남 윤씨 외가가 근처에 있는 강진에 귀양을 간 것은 정약용에게 큰 행운이었다.

외가에서 많은 책을 얻어서 연구에 참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배지인 만덕산의 얕은 야산에는 차가 많이 생산돼 ‘다산(茶山)’이라 했는데, 그의 호 ‘다산’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정약용은 다산초당(茶山草堂)을 짓고, 인공폭포와 연못을 만들고 채소도 심으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갔다.

초당의 바위 절벽에는 정석(丁石)이라는 두 자를 새겨 자신의 공간임을 확인해 두었다.

관료기간 중에는 누릴 수 없었던 많은 시간을 활용해 다산은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유배지에서 농민생활의 현실을 직접 체험하면서 현실을 개혁할 수 있는 방안을 붓으로 정리해 나갔다.

황상 등 다산을 따르던 제자들 도움도 컸다.

‘전론’, ‘탕론’, ‘원목(原牧)’ 등을 저술해 혁명적인 토지정책을 제시했고, 1818년 고향으로 돌아와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의 명저를 담은 ‘여유당전서’ 500여권을 완성했다.

다산이 오늘날까지 실학의 집대성자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에는 유배의 경험과 시간, 그리고 유배라는 극한 환경에도 좌절하지 않는 열정이 큰 작용을 했다.‘경세유표’에서는 ‘주례(周禮)’에 나타난 주나라 제도를 모범삼아 중앙과 지방의 정치제도를 개혁할 것을 주장했다.

정치적 실권을 군주에게 주고, 군주가 수령을 매개로 백성을 직접 다스리도록 하되, 백성의 자주권을 최대한 보장해 아랫사람이 통치자를 추대하는 형식으로 권력이 형성돼야 함을 강조했다.

오늘날에도 추구되는 ‘상향식 민주주의’의 입장을 밝힌 것이다.

목민관의 임무를 강조해 수령들의 청렴을 강조하고, 수령이 탐학에 빠지지 말고 백성을 적극 보호할 것을 주장한 ‘목민심서’와, 형정(刑政)에 관한 개선책이 제시된 ‘흠흠신서’는 ‘경세유표’와 함께 그의 3대 저술로 손꼽힌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근처에 다산의 생가가 있다.

지금도 이곳에 가면 생가가 복원이 돼 있고, 한강이 바라다보이는 곳에 정약용과 부인의 무덤도 있다.

실학박물관도 바로 옆에 조성돼 조선시대 실학의 흐름을 한눈에 접할 수 있게 한다.

생가 쪽을 조금 나와 강변 쪽으로 조성된 수변공원 일대는 정약용이 이곳을 거닐면서 사색을 하고, 배를 타면서 벗들과 교유했던 곳이다.

올해 가을은 다산이 해배된 지 정확히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다산을 기억하기에는 더욱 의미가 큰 해인 만큼 남양주와 강진에 소재한 다산 유적지를 찾는 시간을 가져 보면 좋을 것 같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