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투성이 척박한 땅에서 태어난 피노 누아/관능적이면서 화려한 과일향에 ‘아찔’살짝 스치고 지났을 뿐인데. 아찔한 향기가 온 몸을 감싼다.

이어 나를 이끄는 손.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농염함과 지적인 매력이 한데 어우러지는 강렬한 유혹. 데이지 꽃처럼 나를 산산히 부셔버릴 것을 알면서도 결코 빠져나올 수 없다.

이토록 섹시한 피노 누아가 있었던가. ‘란쵸 살시푸에데스(Rancho Salsipuedes)’. 미국 캘리포니아 중부 해안가에서 20km 떨어진 지역이름인데 스페인어로 ‘벗어날 수 있으면 벗어나라(Get out of here if you can)’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이곳은 매우 척박한 토양입니다.

최대고도 210m, 경사 45도에 달하는 바위투성이의 가파른 산등성이로 살을 에는 매서운 바람과 차가운 해양성 기후로 사람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곳이죠.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곳에서 뛰어난 포도가 생산됩니다.

가파른 경사때문에 포도밭은 햇볕을 골고루 받고 영양분이 거의 없어 포도나무의 뿌리는 생존하기 위해 땅속 깊숙하게 파고들면서 다양한 토양의 성분과 미네랄을 흡수합니다.

포도나무 한그루에 열리는 포도의 양은 매우 적지만 떼루아의 정체성을 세밀하게 보여주는 응축된 포도가 생산되죠. 바로 캘리포니아를 대표하는 프리미엄 피노 누아, 샤도네이 생산지인 산타바바라 카운티의 산타 리타 힐즈(Santa Rita Hills)가 바로 이곳에 있는 이유입니다.

산타 리타 힐스는 나파밸리보다 더 남쪽에 있지만 여름철 최고 기온이 섭씨 28도일정도로 캘리포니아에서 유일하게 서늘한 지역입니다.

일조량이 아주 뛰어나고 태평양을 향해 동∼서 방향으로 열린 지형이라 서늘한 바닷바람이 아무런 장애물없이 늘 포도밭으로 불어옵니다.

안개까지 끼면서 밤에는 포도밭의 낮에 받은 열기를 떨어뜨려 큰 일교차를 보이면서 포도는 와인에서 가장 중요한 산도를 잔뜩 움켜쥐게됩니다.

산타바바라는 1782년 스페인계 수도사들이 포도재배를 시작하면 와인의 역사가 시작됐지만 금주령으로 궤멸됐다 1970∼1980년대에 포도나무를 다시 심게 됩니다.

캘리포니아 와인 생산자들은 대부분 따뜻한 곳에서 포도를 재배하다 산타 리타 힐스에서 뛰어난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속속 이곳으로 진출하면서 산타 리타 힐스는 독립된 AVA(와인용 포도재배지역)로 지정됩니다.

나파밸리의 3분의 2, 소노마의 절반 정도 면적으로 와이너리는 59곳에 불과하지만 천혜의 자연조건 덕분에 대부분의 프리미엄 와인들이 이곳에 생산됩니다.

570만원을 호가하며 미국 컬트와인을 대표하는 스트리밍 이글(Screaming Eagle)과 호나타(Jonata)의 소유주는 미국 스포츠 재벌 스탠 크랭키(Stan Kroenke)입니다.

그는 미국 프로축구팀 콜로라도 래피즈, NBA 덴버 너기츠, 미국프로풋볼(NFL) 로스앤젤레스 램스의 구단주이자 아스널 FC의 대주주입니다.

그가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천재 와인메이커 맷 디즈(Matt Dees)와 손잡고 2008년 산타 리타 힐스에 프리미엄 피노 누아와 샤도네이 와인에 집중하는 더 힐트(The Hilt)를 세웁니다.

Hilt는 ‘칼자루’라는 뜻으로 날카롭게 예리하게 떼루아를 드러내기 위해 아낌없이 모든 것을 퍼부어 전력을 다해 와인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은 네이밍이라는군요. 최대 45년 수령 포도로 빚는 올드 가르드(Old Guard)과 뱅가르드(Vanguard) 등 2종류의 피노 누아가 대표 와인으로 최근 나라셀라를 통해 국내에 수입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부르고뉴 등 구대륙 스타일인 올드 가르드는 흙내음에 집중한 와인으로 새오크를 10%만 사용해 오크향을 최대한 절제한 피노 누아입니다.

스파이시한 향이 돋보이는데 민트, 멘솔, 검은 후추, 아니스, 말린 담배잎, 프로슈토의 아로마가 느껴지며 포도으 농축미와 탄닌, 산도가 잘 어우러집니다.

핵심포도밭은 래디안 빈야드(Radian Vineyard)로 야성적이면서 단단한 구조감의 탄닌, 흙냄새, 스파이시한 포도가 생산됩니다.

뱅가르드는 관능적이면서 화려한 과일향이 두드러진 신대륙 스타일로 블랙 베리 등 검은 과일과 감초와 민트의 허브향, 초리조 소시지의 풍미를 지녔습니다.

마치 그리스 신들의 멋진 조각상처럼 근육과 살집을 모두 갖춘 와인입니다.

완만한 산등성이 포도밭 밴트락 빈야드(Bentrock Vineyard)의 포도로 빚는 뱅가드 피노 누아는 오랫동안 천천히 숙성되는 와인으로 벨벳같은 풍부한 질감과 스파이시함이 돋보입니다.

더 힐트 이스테이트 피노 누아(The Hilt Estate Pinot Noir) 2015는 올드 가르드의 래드안 빈야드와 뱅가드 밴트락 빈야드의 피노 누아를 블랜딩한 와인입니다.

최대 45년 수령의 포도나무를 사용하는데 검붉은 과일과 달콤한 과일, 으깬 장미꽃 허브향이 입안에서 폭발하고 신선한 흙내음도 느껴집니다.

탄닌은 실크처럼 부드럽고 다양하고 짭짤한 미네랄도 돋보이는 피노 누아로 시간이 흐르면 더 아름다운 모습을 선사할 것으로 보입니다.

더 힐트 이스테이트 샤도네이(The Hilt Estate Chardonnay) 2015는 샤도네이 100%으로 빚은 와인으로 관능적인 농염함과 생기발랄함이 어우러집니다.

레몬, 감귤 등 시트러스 과일향과 침샘을 자극하는 신선한 산도, 부서진 돌 같은 미네랄이 도드라집니다.

오크를 아주 잘 다스려 마치 ‘캘리포니아의 샤블리’같은 느낌을 주네요. 포도가 익을 때 당도가 먼저 올라가고 이어 페놀류가 따라오는데 페놀류가 완숙돼야 포도는 제대로 숙성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늘한 기후에서 자란 샤도네이라 과숙되지 않으면서 정확한 산미와 미네랄 풍미가 포도에 잘 스며든 와인입니다.

다양한 한식과 좋은 궁합을 보입니다.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