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 / 조선말로 만들어진 첫 번째 발성영화 / 관객 호기심 끌어 상영 첫날부터 만원 / 부족한 기술력·日 자본 의존 등은 한계 / 대중성 보장된 러브스토리 고전 춘향전 / 韓 영화사서 여러 차례 분수령 역할 해 / 주연 맡은 문예봉 '3000만의 연인' 등극◆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1935)’한국영화 역사에서 기술적 도약은 언제나 ‘춘향전’과 함께 열렸다.

본격적인 극영화 제작도, 사운드 제작 시스템으로의 전환도, 컬러 시네마스코프 시대의 개막도, 70㎜ 영화의 시도도 모두 ‘춘향전’을 맨 앞에 내세웠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랑 이야기인 ‘춘향전’의 대중성은 새로운 영화 기술을 실험하기에 가장 안전한 발판이었을 것이다.

1935년 10월, 단성사에서 개봉된 ‘춘향전’은 조선 고전 춘향전의 영화화라는 점에서 특히 주목을 받았다.

안석영은 이 영화가 "각본을 가지고 감독과 촬영이라는 부분을 나누어 영화화"한 첫 번째 춘향전이라고까지 썼다.

(‘조선 토키 춘향전을 보고’, 조선일보 1935년 10월11일자) 사실 영화사에서 첫 번째 ‘춘향전’은 1923년 일본인 하야카와 고슈(早川孤舟)가 부업공진회에 맞추어 제작한 무성영화 ‘춘향전’이다.

민간 자본으로 제작된 최초의 극영화로 기록되는 이 영화는 남원 로케이션, 기생 출신 배우와 활동사진 인기 변사의 출연 등을 내세웠다.

발성영화 ‘춘향전’은 조선인 감독이 조선인의 시나리오로 조선인을 위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강조됐다고 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1930년부터 외국에서 제작된 발성영화가 수입 상영되기 시작하고 거의 5년여 동안 외국어 발성 영화를 감상만 해왔던 조선에서 ‘춘향전’은 그 존재 자체가 조선인 관객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상영 첫날부터 초만원을 기록한 ‘춘향전’에 대한 관객들의 호기심과 감격을 인돌(서항석)은 이렇게 적었다.

"종래 발성영화라면 의례히(으레) 외국영화로서 거기서 지껄여 나오는 외국어는 들어도 모르는 채 궁금히 넘기는 것이 일대 유감이던 차에 어색하고 서투르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의 조선어가 화면에 움직이는 조선인의 입에서 들리는 것이 마치 양요리에 질린 사람에게 김치 맛이 정답듯 하여 보기와 듣기에 어지간히 호감이 돌게 될 것도 당연한 일이다."(‘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5년 10월11일자)◆첫 번째 ‘민족어 영화’ 제작의 이면1935년 ‘춘향전’이 공개될 때까지 조선영화계는 외국산 발성영화의 기술적 성취를 부러워하며 근근이 무성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 변변한 무성영화도 내놓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성영화 기술을 시도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새로운 기술에 대한 갈망은 쉽게 포기되지 않았다.

한국영화사에서 언제나 영화 기술의 선구자였던 이필우는 1930년 나운규와 함께 ‘말 못할 사정’을 발성영화로 제작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제작되지 못했고,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걷다가 1930년대 중반 ‘최초의 발성영화’라는 타이틀을 두고 경쟁하게 된다.

먼저 발성 기술을 성공시킨 것은 이필우였다(나운규의 첫 번째 발성영화는 한양영화사에서 제작한 ‘아리랑 3편’이다). 이필우는 경성 흥행계의 실력자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가 설립한 경성촬영소에서 발성영화 제작에 도전했고, 일본 교토의 에토나 촬영소에서 사용하던 NT시스템의 개발자 나카가와 다카시(中川?史)의 도움으로 ‘춘향전’의 제작에 성공했다.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은 조선인 기술진의 주도 하에 사운드 기술의 토착화를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영화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만 이 영화가 일본인 자본가의 투자와 일본인 기술진의 협력을 통해 제작됐고, 당시 ‘춘향전’ 광고에서 강조된 ‘조선폰 전발성’ 기술이 일본 기술진과의 협업을 통해 달성된 것이었다는 점을 적어둘 필요가 있다.

또한 ‘춘향전’은 ‘민족어 영화’의 시대를 열어준 영화인 동시에, 화면 한편에 일본어 자막을 삽입한 첫 번째 조선영화라는 점도 덧붙여 두어야겠다.

즉 일제 통치 하에서 전개된 ‘조선어 영화’ 제작은 일본인의 자본과 기술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며, 드디어 민족어 영화가 출발한 그때 재조선 일본인과 바다 건너의 일본어 사용자도 관객으로 상상하는 조선영화 시대가 시작됐던 것이다.◆발성영화 제작 고심담‘춘향전’ 녹음은 이필우, 감독은 그의 동생 이명우가 맡았다.

당시 단성사의 개봉 광고는 이명우와 나란히 김소봉을 감독으로 내세우고 있다.

김소봉은 일본인 감독 야마자키 유키히코(山崎行彦)가 경성촬영소에서 활동할 때의 이름인데, 그가 이 영화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른 자료는 이명우만을 감독으로 기록하고 있고, 당시의 많은 이들은 최초의 발성영화로서 ‘춘향전’의 기술적 성취에 주목하면서 이 영화를 이필우·이명우 형제의 작품이라고 인식했다.

1941년 이치가와 사이(市川彩)가 정리한 조선영화 제작일람은 아예 김소봉 대신 이필우를 기입해 ‘춘향전’을 이필우와 이명우 형제가 연출한 영화로 기록하기도 했다.

감독 이명우는 열악한 제작 인프라와 경험 부족 속에서 진행된 ‘춘향전’ 제작 고심담을 잡지에 기고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당시 경성촬영소의 스튜디오는 방음설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제작진은 조용한 밤을 틈타 멍석에 물을 축여 스튜디오 벽을 두 겹으로 막아놓고 촬영했고, 촬영 도중 들려오는 온갖 잡음 때문에 몇 번이나 촬영을 멈추고 다시 반복해야 했다.

후시녹음에 대한 제작자의 몰이해와 충돌하고 그를 설득해야 하는 상황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명우 스스로도 ‘춘향전’이 처음 발성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의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연기, 그리고 배우의 입모양(이미지)과 대사(사운드)의 동조(synchronization) 실패, 심한 잡음 등 초기 발성영화의 한계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는 점을 인정할 만큼 ‘춘향전’은 성공과 실패를 동시에 끌어안고 있는 영화였다.

(이명우, ‘춘향전을 제작할 때 - 조선 영화감독 고심담’, <조선영화>, 1936년 10월)그러나 "춘향전의 발성화는 또한 조선영화의 조종(朝宗)일 것을 확신한다"는 개봉 광고의 문구처럼, 시행착오는 경성촬영소가 초기 발성영화 제작의 요람으로 자리하는 밑바탕이 됐다.

경성촬영소는 이후 발성영화 ‘아리랑고개’ ‘홍길동전 속편’ ‘장화홍련전’ ‘미몽’ ‘오몽녀’ 등을 연이어 공개했고, 그중 몇 편은 일본에도 수출됐다.

이미 외국 발성영화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 경성촬영소의 영화들은 여러 면에서 조악하게 느껴지기 마련이었지만, 경성촬영소 제작진은 신작을 공개할 때마다 의욕적으로 새로운 기술을 실험하고 조선영화다운 사운드트랙을 구축하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춘향전’, 문예봉의 시대를 열다한편 ‘춘향전’은 3000만의 연인이라는 수식어로 알려지게 될 배우 문예봉의 시대를 연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1932)’에서 나운규가 연기한 춘삼의 딸로 출연하며 스크린에 데뷔한 문예봉은 1935년 주연으로 출연한 발성영화 ‘춘향전’과 무성영화 ‘춘풍’이 모두 좋은 흥행 성적을 올리며 1930년대 중반 조선영화계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춘향전’의 출연으로 한국영화 사상 처음으로 ‘말하는 여배우’가 된 문예봉은 이후 다수의 영화에 출연하며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광복 후에는 남편인 극작가 임선규와 함께 월북해 북한영화계에서 활동했는데, 한때 숙청됐다가 복권하면서 출연한 영화도 ‘춘향전(1980)’이다.

이 영화에서 문예봉은 이몽룡의 모친으로 출연했다.

‘3000만의 연인’에서 ‘인민배우’가 되기까지, 식민과 분단의 한반도에서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낸 배우 문예봉의 시대는 1935년 ‘춘향전’과 함께 시작됐다.

이화진 한국 영화사 연구자·‘소리의 정치’ 저자